[핀란드에서 찾는 화천의 미래③]
DMZ 화천~북극권 로바니에미, ‘평화의 종’으로 잇는다
-김세훈 군수, 전쟁 상흔 공유한 두 도시에 평화협력 제안
-9·21 세계 평화의 날 또는 12·10 노벨평화상 시상일 공동 타종 구상
-강수영장·수상사우나·산림자원도 탐색…화천 접목 가능성 살펴
-산타클로스·북극권·오로라까지…지역의 조건을 세계적 브랜드로
핀란드 현지시간 새벽 2시.
시차가 아직 몸에 남아 있던 김세훈 화천군수는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다 오전 5시50분 운동화를 신고 숙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로바니에미 강변.
한 시간이 넘도록 강을 따라 걸으며 김 군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강 주변 시설로 향했다.
오토캠핑장과 강수영장, 소공원, 모터보트 선착장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특히 김 군수가 관심을 보인 것은 강수영장과 모터보트 선착장이었다.
공식 견학지가 아니었다. 새벽 운동 중 우연히 발견한 시설도 김 군수에게는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북한강과 파로호 등 풍부한 수변자원을 가진 화천의 관광과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 군수는 현장 기록에 “강수영장과 모터보트 선착장은 꼭 화천군에 접목해보고 싶다”고 적었다.
핀란드 현지 일정 3일차 역시 그렇게 ‘화천에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날 화천이 로바니에미에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가능성은 관광시설이 아니었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DMZ 접경지역 화천과 북극권 로바니에미를 ‘평화’로 연결하는 새로운 국제교류였다.
■ 전쟁의 상처 공유한 두 도시, 평화로 손잡다
김세훈 군수는 이날 안띠 마따 로바니에미시 부시장과 만나 ‘DMZ에서 북극권까지, 평화의 울림’을 주제로 양 도시 간 평화협력을 제안했다.
대한민국 최북단 접경지역 중 하나인 화천과 북극권 도시 로바니에미.
수천㎞ 떨어진 두 도시지만 현대사의 아픔에는 공통점이 있다.
로바니에미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라플란드 전쟁 당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는 상처를 입었다.
화천 역시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두 도시 모두 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었지만 폐허를 딛고 도시를 재건했고, 오늘날에는 자연과 겨울을 활용한 관광도시로 성장했다.
김 군수는 이러한 두 도시의 공통된 역사를 과거의 상처에만 머물게 하지 말고 미래의 평화협력 자산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 상징이 바로 ‘평화의 종’이다.
■ 로바니에미의 종, 화천 세계평화의 종공원으로
김 군수는 로바니에미시를 상징하는 종을 화천군에 기증해 줄 것을 요청했다.
종이 전달되면 화천군의 세계평화의 종공원에 전시해 로바니에미가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국내외 방문객들과 공유하겠다는 구상이다.
교류를 한 번의 기증 행사로 끝내지 않겠다는 뜻도 밝혔다.
양 도시가 평화의 종을 서로 주고받고, 매년 같은 날 동시에 종을 울리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김 군수가 제안한 날짜는 9월21일 ‘세계 평화의 날’ 또는 12월10일 노벨평화상 시상일이다.
DMZ 화천과 북극권 로바니에미에서 같은 날 평화를 염원하는 종소리를 울리자는 것이다.
실현된다면 화천군이 평화의 종을 매개로 이어온 오슬로·모로쿨리엔과의 평화협력 네트워크를 로바니에미까지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큰 영감 받았다”…로바니에미도 긍정 검토
안띠 마따 부시장은 화천의 제안에 공감을 나타냈다.
안띠 마따 부시장은 “전쟁의 아픔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도시가 평화와 관련해 협력하면 좋을 것”이라며 “평화의 종을 주고받아 타종행사를 한다는 제안에 큰 영감을 받았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아직 양 도시 간 평화의 종 교류가 확정된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를 공유한 두 도시가 그 기억을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평화의 상징으로 전환하는 국제교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 군수는 “화천과 로바니에미는 전쟁의 상처를 딛고 평화와 재건, 겨울관광의 도시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전쟁의 기억을 평화의 메시지로 바꾸는 의미 있는 교류를 이어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핀란드 방문에 동행한 조웅희 화천군의회 의장도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를 공유하는 두 도시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평화의 종을 매개로 주민들이 함께하는 지속적인 교류로 발전시키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화천군의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행정기관 간 교류에서 한발 더 나아가 평화·문화·관광을 매개로 한 주민 교류까지 확장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 오전 9시부터 다시 회의…이번에는 다른 겨울도시의 해법을 듣다
새벽 강변 답사를 마친 김 군수는 오전 9시부터 세계겨울도시 시장회의 일정에 들어갔다.
각국 도시들의 주제발표를 경청하며 겨울도시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대응전략을 살폈다.
전날 세계 겨울도시 관계자들에게 화천산천어축제와 ‘화천형 햇빛연금’을 소개했다면, 이날은 다른 도시들이 자연과 겨울, 지역자원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듣는 데 집중했다.
바쁜 일정 가운데 점심은 현지에서 찾은 한국식당에서 해결했다.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김 군수는 “김치찌개를 정말 땀 흘리며 맛나게 먹었다”고 현장 기록에 남겼다.
새벽부터 이어진 공식·비공식 일정 사이에서 잠시 만난 고향의 맛이었다.
■ 새벽에 본 강수영장, 오후에는 ‘물 위의 사우나’
오후에도 현장 일정이 빼곡하게 이어졌다.
방문단은 수상보트를 활용한 핀란드식 사우나 시설과 이글루형 천막, 목재 관련 놀이시설 등을 살폈다.
특히 수변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눈길을 끌었다.
새벽 운동길에서 발견한 강수영장과 모터보트 선착장에 이어 수상사우나까지 살펴보면서, 화천의 북한강과 파로호를 관광객들이 직접 경험하고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다만 핀란드 시설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수질과 안전, 기후와 계절성, 접근성, 사업비와 운영주체 등 화천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화천형 수변관광’으로 재설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핀란드의 숲은 산업이 되고 교육이 됐다
출장단은 필케 과학센터를 방문해 핀란드의 산림과 목재 활용 사례도 살폈다.
핀란드가 풍부한 산림자원을 원목 생산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산업과 교육, 체험, 놀이 콘텐츠로 확장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화천군은 이를 지역 산림·목재산업과 목재문화체험장 등에 접목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
이는 2024년 11월 강원도와 핀란드 북카렐리아 간 산림협력 국제심포지엄 이후 이어진 산림 분야 교류를 화천으로 넓혀간다는 의미도 있다.
앞선 일정에서 세계적인 목재 놀이시설 기업 랍셋(LAPPSET)의 생산현장을 살펴본 데 이어 산림의 교육·체험적 활용까지 확인하면서 화천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베어내는 자원’에서 ‘체험하고 즐기는 자원’으로 확장할 가능성도 살펴본 것이다.
■ 평화·관광·산림…서로 달랐지만 답은 하나였다
이날 화천군이 로바니에미에서 살핀 대상은 평화와 관광, 산림으로 서로 달랐다.
하지만 방향은 같았다.
전쟁의 기억은 평화교류의 자산으로, 강과 숲은 관광과 산업의 자산으로, 북극권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세계적인 도시브랜드로 바꿔낸 로바니에미의 방식이었다.
‘무엇을 새로 만들 것인가’보다 ‘이미 가진 것에서 어떤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것인가’라는 접근이다.
이 같은 로바니에미의 방식은 화천의 미래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 ‘산타’ 하나가 도시 전체를 움직인다
이날 만찬 장소는 로바니에미를 상징하는 산타클로스 마을이었다.
현장에는 여러 개의 대형 산타 기념품 매장이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북극권의 시작을 상징하는 Arctic Circle 경계선을 넘나들며 사진을 찍고, 북극권을 직접 밟아봤다는 경험을 남긴다.
김 군수 일행도 북극권 경계 표시와 상징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산타를 상징하는 붉은색 온도계 형태의 탑과 세계 주요 도시의 방향·거리를 표시한 이정표도 눈길을 끌었다.
특별한 시설 하나보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기억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면을 공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 1950년의 한 장면도 관광도시의 역사가 됐다
산타클로스 마을에는 1950년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로바니에미를 방문했을 당시 마련된 시설도 남아 있다.
전쟁 이후 재건 과정에 있던 로바니에미를 찾은 루스벨트 여사의 방문과 관련된 이 공간은 이후 산타클로스 관광지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 가운데 하나가 됐다.
김 군수도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화천 방문단이 주목한 것은 오래된 건물 자체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역사와 이야기를 오랫동안 보존하고, 그것을 오늘날 관광객이 경험할 수 있는 도시 콘텐츠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로바니에미는 산타클로스라는 이야기에 북극권이라는 지리적 상징성과 자연, 쇼핑과 숙박, 체험을 결합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산천어축제라는 강력한 겨울 브랜드를 가진 화천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밤 11시, 북극 하늘에서 만난 오로라
새벽 2시에 시작된 긴 하루의 마지막 여정은 오로라 헌팅이었다.
김 군수 일행은 오후 10시께 오로라를 보기 위해 현장으로 이동했다.
기다림 끝에 오후 11시 무렵 어두운 하늘에서 희미한 오로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 군수가 현장 기록에서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북극의 오로라”라고 표현했던 순간이다.
오로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관광시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의 관광객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차를 타고 이동하고 추위 속에서 기다린다.
로바니에미는 그 자연현상에 이동과 숙박, 가이드, 촬영과 체험을 연결해 하나의 관광산업을 만들었다.
자연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경험하는 방법에 가치를 더하는 관광이다.
■ 화천에도 이미 ‘화천만의 것’이 있다
로바니에미에서 화천군이 확인한 것은 새로운 시설 몇 개가 아니었다.
전쟁의 기억은 평화교류로, 강과 숲은 관광과 산업으로, 북극권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세계적인 도시브랜드로 바꿔낸 ‘지역자원의 재발견’이었다.
화천에도 이미 북한강과 파로호가 있고 숲이 있다.
산천어축제가 있고, 대한민국 최전방 접경지역이라는 역사적·지리적 특수성도 있다.
핀란드의 시설을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화천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새로운 가치를 입히는 일이다.
이번 평화의 종 제안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국전쟁의 격전지라는 아픈 역사를 과거에만 가두지 않고 국제적인 평화교류의 자산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겨울을 축제로 바꾼 화천.
햇빛을 주민소득으로 바꾸려는 화천.
그리고 이제는 전쟁의 기억을 평화의 가치로 바꾸려는 화천.
핀란드에서 찾은 화천의 세 번째 미래는 ‘DMZ에서 북극권까지 울려 퍼지는 평화의 종소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김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