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주년 광복절, 화천의 독립운동사를 다시 생각한다
― 깃발 하나로 들불이 된 박장록 선생과 상서면 22인, 이제 지역이 응답할 차례다
해마다 8월 15일 광복절이 돌아오면 전국 곳곳에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기념식과 행사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 화천의 현실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광복절이라는 뜻깊은 날을 맞아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되새기고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을 기억하는 화천만의 자리가 얼마나 충실하게 마련돼 왔는지 되묻게 되기 때문이다.
도 단위 행사에 참여하거나 해마다 되풀이되는 의례로 광복절을 보내기에는 화천이 품고 있는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가 너무나 깊고 뜨겁다.
화천은 결코 광복절을 무심히 흘려보낼 수 없는 고장이다. 1896년 을미의병에 참여한 지용기(池龍起) 의병장이 이후 춘천·화천·양구 일대에서 항일 의병활동을 펼쳤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3,500여 명의 군민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175명이 검거됐으며, 이는 당시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검거 인원으로 기록돼 있다.
■ 107년 전의 깃발, 그리고 잊혔던 이름들
107년 전인 1919년 3월, 화천의 청년 박장록(朴長錄) 선생은 손수 ‘대한독립국만세’라고 적은 깃발을 만들며 화천 장날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를 앞두고 일제 경찰에 체포됐고, 결국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독립을 향한 화천 사람들의 열망까지 가둘 수는 없었다.
3월 28일 상서면 봉오리 뒷산에서 봉화가 오르자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거쳐 화천읍 방면으로 행진했고, 인근 주민들이 합류하면서 그 규모는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산골마을에서 시작된 독립의 함성이 들불처럼 번져나간 것이다.
그리고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상서면 만세시위와 관련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이는 모두 22명에 이른다. 단일 면 단위에서 이처럼 많은 독립유공자가 확인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서면의 3·1운동사가 지닌 역사적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박장록 선생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2025년 제106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같은 해 제80주년 광복절을 계기로 김달순·송흥만·안용순·한원길·한사겸 선생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뒤늦게나마 이들의 공적이 국가의 이름으로 인정됐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묻게 된다. 왜 이들의 이름과 희생을 찾아내는 데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필요했는가.
사료와 판결문 속에 묻혀 있던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데에는 은퇴 언론인 김동섭 한림대 객원교수의 오랜 조사와 노력이 있었다. 한 개인 연구자의 집요한 기록과 발굴이 잊힌 역사를 되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이제 그 다음 몫은 지역사회와 행정이 맡아야 한다.
■ ‘3·1 만세운동 기념공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보훈으로
화천군은 2017년 화천읍 상리에 ‘3·1 만세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등 선열들의 뜻을 기릴 수 있는 공간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보훈은 비석과 탑을 세우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념공원이 자라나는 아이들과 주민들에게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광복절과 3·1절에만 잠시 기억되는 공간에 머문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기록될 때 보존되고, 다음 세대가 배우며, 공동체가 함께 기억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제 화천의 보훈 행정과 지역사회도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첫째, 화천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예우하는 자리를 정례화해야 한다.
광복절과 3·1절을 맞아 지역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모시고 선대의 희생을 기리는 동시에 후손들의 삶과 목소리를 듣는 화천군 차원의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일회성 위문에 그치지 않고 현행 제도를 살펴 의료·복지 등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피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둘째, 지자체 차원의 ‘미발굴 독립운동가 사료 조사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지역 독립사의 복원을 개인 연구자의 헌신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화천군이 관련 기관 및 전문가들과 협력해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3·1운동 관련 사료와 판결문, 수형 기록, 당시 신문과 행정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아직 이름을 되찾지 못한 독립운동가가 있다면 찾아내고, 공적이 확인될 경우 국가 서훈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것 역시 지방자치단체가 할 수 있는 중요한 보훈이다.
셋째, 지역의 아이들에게 ‘우리 동네 독립사’를 가르쳐야 한다.
화천의 청소년들이 교과서 속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고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대한독립국만세’ 깃발을 만들었던 박장록 선생은 누구였는지, 1919년 3월 28일 상서면 봉오리 뒷산에는 왜 봉화가 올랐는지, 2,000명에 이르는 주민들은 무엇을 위해 화천을 향해 걸었는지를 지역의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한다.
‘3·1 만세운동 기념공원’ 역시 단순한 기념시설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과 연계한 답사와 체험, 해설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억하는 공동체만이 미래로 나아간다
기록되지 못한 희생은 결국 망각 속에 묻힌다.
강원 북부라는 지리적 여건과 분단·전쟁으로 인한 오랜 단절 속에서 희미해졌던 화천의 독립운동사를 다시 세우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역사를 딛고 오늘을 살아가는지를 확인하는, 화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올해는 광복 81주년이다.
이번 광복절이 해마다 돌아오는 하루의 기념일에 그치지 않고 화천의 항일 역사를 다시 조명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독립유공자와 후손을 제대로 예우하고, 아직 찾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찾아 기록하며, 그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 이제 시작돼야 한다.
107년 전 화천 땅에서 울려 퍼졌던 3,500여 명의 함성을 기억하는 일.
그들의 이름을 찾고, 기록하고, 후손에게 전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광복 81주년을 맞은 오늘, 화천군과 지역 언론, 그리고 군민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할 기억의 책무일 것이다.
【김용식】